업(業)은 실재하는가?
혜인스님/조계종 교육아사리
<왕이 물었다.
“존자 나가세나여! 이 명칭과 형태(名色, 정신과 육체, 즉 인격적 개체)에 의해 선(善) 또는 불선(不善)의 행위(業)가 이루어집니다. 그들 업(業)은 어디에 머물러 있을까요?”
“대왕이시여!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라 떠나지 않는 것처럼 그들 업(業)은 인격적 개체에 수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자여! 그렇다면 ‘그들 업(業)은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여 그들 업(業)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십시오.”
“대왕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수목(樹木)이 아직 과실을 맺지 않았을 때에 ‘그들 과실은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여 그 과실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개체의 연속이 끊어지지 않았을 때에 ‘그들 업(業)은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여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멋진 답이십니다. 존자 나가세나여!”>
주지하다시피 업(業)은 까르마(karma)의 번역어로 행위를 의미한다. 행위는 몸(身), 입(口), 생각(意)으로 이루어지고 이를 삼업(三業)이라고 하지만 모든 업(業)의 근원은 의도이다. 업(業) 자체는 단순히 행위를 의미하지만 그 행위는 필연적으로 그것에 상응하는 어떤 결과를 산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업(業)에 기초한 인과관계를 보면, 현재의 상태는 과거 업(業)의 결과이고 미래의 모습은 현재 업(業)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결과라는 측면에서 확장하면 이러한 인연과보(因緣果報)는 이 생(生)뿐만 아니라 다음 생(生)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윤회(輪廻)의 작동원리로 작용하면서 해탈을 방해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한편, 불교의 삼도(三道)를 살펴보면 업(業)의 순환과정을 알 수 있다. 윤회삼도(輪廻三道)라고도 하는 삼도는 혹도(惑道)·업도(業道)·고도(苦道)를 말한다. 혹도(惑道)는 번뇌도(煩惱道)라고도 하는데 번뇌 자체는 아직 선(善)도 악(惡)도 아닌 상태지만 업(業)과 고(苦)를 유발시키는 원인이 된다. 즉 번뇌(惑)가 원인이 되어 신·구·의 삼업(三業)이 일어나고 업(業)이 원인이 되어 고(苦)가 생겨난다. 그리고 고(苦)는 또 다른 번뇌를 만들어 낸다. 이렇게 업(業)이 형성되고 그 결과들이 산출되는 과정은 다분히 내재적이고 순환적으로 지속된다.
행위나 작용을 이론적으로 고찰하면, 그것들은 모두 무상(無常)한 것으로 순간적 현상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지속성과 통일성이 보이는 것은 전후 순간의 행위를 관련지우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잠재적인 업, 잠재적인 번뇌, 형성력으로서의 행(行, samskra)은 그와 같은 힘을 말한다. 이것을 이전까지의 행위의 여세라는 의미에서 ‘습기(習氣, vsan)’라 하고, 다음 행위를 야기하는 원인이라는 의미에서 ‘종자(種子, vija)’라 부르며, 또 이 현상 자체를 ‘훈습(燻習)’이라 한다.
쉽게 말해 순간적 현상으로서의 행위나 작용은 단지 업(業)이지만 이것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습관화되며, 습관화된 업은 점점 힘을 얻게 되어 방향성과 힘을 가지게 된다. 업(業)은 해탈하지 않는 한 세세생생 스스로를 규정하고 얽어매는 자신이 만들어 낸 굴레이다.
[출전 : 불교신문 3710호/2022년4월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