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의 성찰
지휴 스님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고,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인다. 〈모든 번뇌의 경〉
태어남, 그곳에 ‘나’라는 생각이 붙어 가짜가 된다. ‘나’라는 생각이 없으면 ‘가짜다, 진짜다’ 할 필요가 없다. ‘나’라는 생각 때문에 환(幻)이 되고 가짜가 된다. ‘나’라는 생각으로 환(幻)에 물들어 있는 것이지, 태어남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보이는 것은 사실인데 나의 견해로써 사실을 왜곡시켜 본래 그 자리를 어지럽게 하므로 괴로움이 생성된다.
지금 만들어진 조건을 살펴보면 어디에 옳음을 두고, 어디에 옳지 않음을 두겠는가? 옳고, 옳지 않음의 기준점을 ‘누구에게 둘 수 있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기준점을 둘 수 없다면 지금 일어나는 어떤 것도 ‘옳다, 옳지 않다’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견해 속에 진실은 없다. 진실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괴로움을 갖는다. 중심이라는 무엇이 나타나야 하고, 그 중심이 물질이 된다면 어떤 물질이 중심이 될 수 있는가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물질을 가지고 물질의 중심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괴로움을 생성하는 일이다.
어떤 물질도 중심이 될 수 없을 때, 모든 물질이 중심이 되고 그곳에 나, 너라는 어떤 중심을 만들지 않으므로 괴로움의 소멸을 이룬다. 존재하는 물질 속에 멈추어진 상태의 침묵된 진실이 드러나는 것은 그 어디에도 정점을 찍을 ‘나’라는 것이 사라졌을 때이다. 왜곡된 정보로 표적 없는 과녁에 화살을 쏘아 올리지만, 매번 빗나가는 것은 활을 잘못 쏜 것이 아니라 과녁이 없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괴로움이 일어난 줄 알아버리면 괴로움의 소멸이 없고, 괴로움의 소멸이 없게 되면, 괴로움의 생성이 없고, 괴로움의 생성이 없으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는 명제는 처음부터 나타난 적이 없게 된다. 괴로움이 사라지면 나라는 집착이 사라져 지금 일어나고 사라지는 어디에도 견해로 알아야 할 것이 없는 사실로 수용되어진다.
부처님께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누구의 괴로움이 아닌 견해로서 왜곡을 일으킨 자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 괴로움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지도 않은 허언(虛言)이다.
알아야 하는 마음은 알지 못함에서 나왔지만, 알지 못하는 마음이 알아야 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알아야 하는 마음과 알지 못하는 마음의 뿌리가 같은데 지금까지 이 둘을 오가며 분별하였음이 확연해지는 것이다. 두 마음 사라지니, 지금 있는 그대로 모두 나타나, 방해함 없이 그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고 나툼이 알려진다.
생사(生死) 병사(病死) 그저 부는 바람인데,
모든 것 내어주고 부들부들 떠는 허깨비
아무 뜻 없이 와서 뜻 없이 가는 그 바람.
무슨 의미가 그리 많은지 해도 해도 끝이 없네.
행주좌와(行住坐臥)어묵동정(語默動靜),
지난 번 불었던 그 바람과 다르지 않은데.
오늘도 그 바람과 다르게 해석하며 즐기는구나.
생각이라고 해도, 생각이 아니라고 해도
그것은 지나온 그저 부는 바람.
누군가에게 스치기만 할 뿐, 그저 부는 바람
스치는 것 각자의 몫, 그러니 각양각색
아무리 메아리쳐도 돌아오는 것 없는 한때 부는 그 바람.
돌아보지 마라 돌아오려 하지 마라.
지금
그저 부는 바람이다.
<출전 : 현대불교신문, 2022년3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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