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생활

중도의 철학 2-2

이원도 2022. 11. 27. 07:02

 

4. 깨달음 산출 원리와 중도

나는 ‘깨달음 산출 원리’를 중도를 찾는 구체적이면서도 포괄적인 기준으로 제안해 왔다. 이 원리는 우리가 불자로서 어떻게 행위해야 할 것인가를 근본적으로 고찰해 보면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 있는 논리적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모든 불자가 가지는 최고의 서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의문의 여지 없이 깨달음이 불자들의 궁극적인 목표다. 불교는 원천적으로 깨달음의 종교이고 철학이다. 그리고 불자들은 깨달음을 통해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열반의 길이 열린다고 믿는다.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순간 행위하며 산다. 그래서 각각의 행위를 규제하고 인도해줄 어떤 원리가 필요한데, 불자들은 그 원리를 깨달음 획득이라는 궁극의 서원과 연관 지어 구하는 것이 자연스럽겠다. 그래서 불자들에게 행위와 사건의 좋고 나쁨, 또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건이나 행위가 깨달음을 산출하는 데 (얼마나) 기여하느냐 아니면 (얼마나) 역행하느냐일 것이다. 다음이 내가 제안해 온 ‘깨달음 산출 원리’다.

 

(어떤 사건 또는 행위가 깨달음 산출에 기여한다.) ↔ (그것이 좋다/옳다.)

(어떤 사건 또는 행위가 깨달음 산출에 역행한다.) ↔ (그것이 나쁘다/그르다.)

 

나는 불자들이 이 원리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만하다고 본다. 그러면 우리가 이 깨달음 산출 원리에 따라 어떻게 중도에 맞는 적절한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과음이나 과식은 건강을 해치고 정신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에 깨달음 산출에 역행한다. 그래서 나쁘다. 따라서 이런 행위는 삼가야 한다.

참선수행은 맑은 정신을 유지하게 도와주어 깨달음 산출에 기여한다. 그래서 좋다. 따라서 정기적으로 참선에 임해야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은 하루에 공부하고 수행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게 해 주어 깨달음을 향한 길에 도움이 된다. 그래서 좋다. 따라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

사용하는 말에 따라 마음가짐이 달라지기 때문에 언어 사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바른말 쓰기는 깨달음에 기여한다. 그래서 좋다. 따라서 말을 바르게 써야 한다.

교수가 자신의 연구를 통해 얻는 진리에 대한 이해는 스스로의 깨달음에 여러 방식으로 도움이 된다. 그래서 교수는 열심히 연구해야 한다.     

 

이 밖에도 깨달음 산출 원리가 우리를 중도에 맞는 적절한 행위로 인도해주는 예는 원칙적으로 무한히 많다. 나는 이와 같이 붓다의 중도의 가르침이 깨달음 산출의 원리를 통해 우리를 구체적으로 가장 적절한 행위로 이끌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자들의 모든 행위의 기준으로 제시된 이 원리가 중도를 찾는 구체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중도를 따르는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붓다가 제시한 팔정도 하나하나도 물론 이 기준을 모두 충족한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대로, 깨달음 산출 원리는 2,500여 년 전 단순했던 사회에 맞게 제시되었던 팔정도가 포함하지 못하는 우리의 복잡한 삶에도 포괄적으로 적용될 수 있어서 좋다.

 

5.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 산출 원리가 중도 원리

중도는 우리가 경우마다 적절하게 행위해야 한다는 가르침이고, 나는 깨달음 산출 원리를 중도를 찾는 기준으로 제안했다. 그런데 위 4절에서는 깨달음 산출 원리를 주로 개인이 그의 중도의 행위를 찾는 방법으로 보여주며 그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예를 몇 들기도 했다. 논의의 전개에서 이런 순서를 따른 이유는 실은 팔정도의 가르침 하나하나도 기본적으로 개인의 관점에서 중도를 찾아 스스로를 이롭게 하여 깨달음과 열반으로 향해 가라는 취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어(正語), 정명(正命), 정업(正業)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려하며 자신의 행위가 그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며 중도를 찾아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이것들도 주로 중도를 찾은 개인을 이롭게 한다는 취지의 가르침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고립되어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이며 우리의 행위 하나하나는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과 다른 모든 유정물 및 무정물과 연결되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굳이 화엄의 법계연기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중생계의 모든 구성원과 어우러져 그 의미가 생겨난다는 점은 분명하겠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나는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행해지는 모든 행위가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중생의 깨달음에 얼마나 기여 또는 역행하느냐에 따라 평가되고 또 가치가 부여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불자들은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행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논증하겠다.

 

모든 중생은 고뇌로부터 벗어나기 원한다.

불자는 모든 중생이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이르면 고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불자는 중생이 스스로 의식하든지 못하든지 그들의 고뇌를 제거해 주는 깨달음과 열반이 실제로 그들 행위의 궁극적 목표로 된다고 이해한다.

중생의 모든 행위의 궁극적 목표로서의 깨달음과 열반은 다른 모든 중생에게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따라서,

깨달음 산출 원리는 모든 중생에게 차별 없이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중생은 다른 모든 중생과 연결되어 존재하고 행위한다. 따라서,

불자는 모든 중생의 깨달음과 열반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행위하는 것이 좋고 옳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을 산출하는 방식으로 행위하여야 한다.

 

개인에게 중도의 행위를 찾아 주는 길잡이로 출발한 깨달음 산출의 원리가 법계연기론에 익숙한 불자들에게는 개인의 사회적 존재자로서의 특성을 부각시켜주는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 산출 원리’로 다가오게 된다.

서양 도덕철학을 이루는 두 근간이 법칙주의와 공리주의인데, 내가 제시하는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을 산출하는 방식으로 행위하라!’는 도덕명령은 이 두 전통의 요구사항을 모두 충족한다. 칸트로 대표되는 법칙주의는 모든 도덕법칙은 반드시 보편화가 가능해야 하고 또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제안은 모든 중생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행위의 원리이고 또 이 원리는 모든 중생이 깨달음과 열반을 얻을 자격이 있음을 인정하며 법칙주의의 요건을 만족시킨다. 한편,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실현을 행위의 기준으로 삼는 공리주의와 나의 원리가 기본 정신을 공유한다는 점은 자명하다고 본다. 다만 ‘행복’이라는 상을 설정하는 서구의 공리주의와는 달리 내 원리는 ‘깨달음으로 모든 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야 열반’이라는 점이 다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글의 마지막 절에서 더 논의하겠다.

이제 사회적 존재자로서 우리의 특성을 고려하며 다시 제안된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 산출 원리’가 적용되는 예를 몇 개 살펴보기로 한다.

이웃 나라에 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다쳤다면 그들에게 재난구조팀과 구호품을 보내주어야 한다. 그들이 빨리 회복하게 되면 그만큼 더 많은 사람이 깨달을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따라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SNS에서 남들에게 악성 댓글을 다는 것은 그들에게 마음의 고통을 초래해 그들의 깨달음 산출에 역행한다. 나쁜 댓글을 다는 사람 스스로도 비뚤어진 심성을 기르게 되어 그가 깨달음의 길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래서 나쁘다. 따라서 악성 댓글을 달면 안 된다.

돈 많고 힘 있는 집안 자제들에게만 교육과 취업의 기회가 열려 있는 체제는 많은 젊은이에게 좌절감을 주어 그들의 깨달음 산출에 역행한다. 이런 체제는 옳지 않다. 따라서 이런 체제를 고쳐야 한다.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은 적군이라도 치료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상 회복이 그들이 고통을 제거하고 깨달음을 얻는 길에 기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군도 치료해주어야 한다.

아픈 사람들이 더 많이 그리고 더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면 그들이 깨달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방향으로 의료서비스를 개선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밖에도 수없이 많은 예를 통해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 산출 원리가 우리의 사회적 삶의 모든 국면에 무리 없이 적용됨을 보여줄 수 있다.

중도를 찾는 구체적 지침으로 제시된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 산출 원리는 4절에서 논의된 깨달음 산출 원리를 자연스럽게 포함한다. 모두가 사회 안에서 다른 이들과 직간접적으로 긴밀히 연결된 삶을 사는 오늘날, 한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이 사회 전체와의 맥락에서 그 의미와 가치가 결정된다는 점은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겠다. 모든 것이 중생계 전체와 연결되어 생멸하고 있는데, 법계로부터 고립되어 한 개인만을 위해 존재하는 깨달음 산출의 원리가 따로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비록 내가 논리 전개의 흐름을 위해 4절과 5절에서 깨달음 산출 원리와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 산출 원리를 각각 따로 논의했지만, 이 둘은 후자의 원리 하나로 통일된다.

이제 이 절에서의 논의를 간단히 정리하겠다. 나는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을 산출하는 방식으로 행위하라!’는 도덕명령이 불자들이 복잡다단한 현대인의 삶에 적용할 수 있고 또 적용해야 하는 행위의 원리라고 생각한다. 고대인들의 단순했던 삶을 위해 제시된 팔정도만으로는 더 이상 80억 명이나 되는 현대인의 복잡하고 치열한 삶의 현장을 모두 포괄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많은 구체적 경우들 하나하나에 각각 새로운 길잡이를 찾아주는 한없이 긴 매뉴얼을 만들어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자들에게 하나의 선명한 원리를 제시해 모든 행위를 위한 단순명료한 길잡이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나는 위의 ‘최대다수의 최고 깨달음 산출 원리’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그리고 이 원리는 공리주의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서 이 원리(와 도덕명령)를 얼마나 잘 따르는가에 대한 양화가능성(quantifiability)조차도 상상해봄 직하다. 양화 가능한 것들은 양적으로 계산하고 쉽게 다룰 수 있어서 좋다. 그래서 현대인에게 더 적합하다.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 산출 원리는 논리적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팔정도를 포함하며 동시에 필연적으로 사회와 연결되어 있는 현대인의 복잡한 삶에서 각각의 경우마다 올바른 길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이끌어 줄 수 있다. 따라서 이 원리가 불자들을 가장 적절하고 옳은 행위로 이끄는 원리가 될 것이다. 그런데 가장 적절하고 옳은 길을 찾아주는 원리가 바로 중도를 따르게 하는 원리이기 때문에,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 산출 원리가 바로 중도의 원리가 된다. 그래서 우리가 붓다의 중도 가르침에 따라 살고자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순간순간에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과 열반을 산출하는 방식으로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직업을 갖고, 정진하고, 마음을 챙기고, 선정에 들며, 또 그 밖의 모든 행위에 임해야 할 것이다.

 

6. 중도와 깨달음

가장 바른 행위를 찾는 중도의 길은 깨달음과 열반 산출을 위해 가장 적절한 행위를 선택함으로써 걷게 된다. 우리가 중도를 택하여 삶에 주어진 고뇌로부터 벗어나려는 이유가 깨달음과 열반을 이루려는 근본적인 서원 때문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중도의 길이 깨달음과 열반의 길과 일치한다는 점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의 논의를 시작할 때 나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극단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극단으로 몰고 가는 이념의 상들을 여의고 중도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일련의 논의를 통해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과 열반) 산출 원리’를 중도를 찾는 구체적인 척도로 제시했다. 그렇다면 내가 이념이라는 상에 대한 집착을 여의기 위한 방법으로 내놓은 이 원리가 엉뚱하게 우리가 집착해야 할 또 하나의 상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모든 상을 여의어야 한다는 내 주장을 나 스스로 논파한 셈이 아닐까?

‘깨달음’과 ‘열반’도 개념으로 포착되는 말들이어서 우리에게 상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상조차 여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그런데 나는 깨달음과 열반이 상으로서는 대단히 예외적인 상이어서, 굳이 상이라고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상이라면 어떤 구체적이고 긍정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이 집착할 수도 있는 것일 텐데, 깨달음과 열반은 그렇게 붙잡을 수 있는 어떤 대상이나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영어에서 ‘nothing’이나 ‘nobody’는 일상에서 쓰이는 단어들로서 일종의 상을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개념들이지만, 이것들은 실은 ‘아무것도 없다’와 ‘아무도 없다’는 뜻으로서 붙잡고 집착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개념들이 아니다. 오히려 이 단어들은 그런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농담이 아니라면, 어떻게 nobody나 nothing에 집착할 수 있겠는가?

‘열반(nirvana)’이라는 말도 무엇이 존재하는 상태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번뇌의 불길이 꺼짐’을 의미한다. 즉 ‘아무 고뇌가 없는 상태’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런 부정적(否定的)인 상태를 의미하는 ‘상’에는 우리가 붙잡고 집착할 아무런 구체적인 대상이나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없다’는 개념 안에 어떻게 무엇이 있어서 그것에 얽매일 수 있겠는가?

‘깨달았다’는 말은 원래 근본적인 진리를 알고 이해했다는 의미였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집착할 대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불교가 가르치는 삶과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진리는 무아(無我)와 연기(緣起)로 대표된다. 무아는 ‘나를 나이게끔 해주는 아무런 실체나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으로, 진정한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이 가르침으로는 집착할 (참된) 나도, 집착되는 대상으로서의 (참된)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아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무엇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혹자는 ‘무아’라는 가르침 자체에 집착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마치 ‘nobody’나 ‘nothing’에 집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명치 못하다.

한편 연기의 가르침 또한 집착의 대상을 주지 않는다. 연기란 사물이 조건에 의존해 생성 · 지속 · 소멸한다는 통찰로서, 대승에서는 연기를 공(空)의 가르침과 동일시한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조건에 의존하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스스로이게끔 해 주는 자성(自性)을 결여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도 독립적 존재로서의 실체가 아니고 또 자성을 결여하기 때문에 만물이 공하다고 표현된다. 그래서 연기가 곧 공이라는 것인데, 붙잡을 실체와 자성이 모두 없는데 도대체 무엇에 집착할 수 있다는 말이겠는가. 연기를 깨닫는다고 해서 무엇에 집착하게 되지는 않는다. 혹자는 또 ‘공’이라는 개념 자체에 집착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마치 ‘nobody’나 ‘nothing’에 집착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어리석을 뿐이다.

나는 이 글에서 사회를 분열시키고 우리를 극단으로 내몰아 갈등으로 치닫게 하는 이념의 상을 여의고 불자들이 선택해야 할 가장 적절한 행위의 기준을 찾기 위해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과 열반 산출 원리를 제시했다. 깨달음과 열반은 붙잡고 집착할 상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이 원리가 또 하나의 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 글의 논의를 마친다.6)7) ■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왔다. 주요 저서로 《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 《생명과학과 불교는 어떻게 만나는가》(유선경 교수와 공저)가 있다. Buddhism for Thinkers를 집필 중이며, 불교의 연기(緣起)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출전 : 불교평론 99호, 202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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