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자 하는 마음과 알고 있다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 곧 수행이다. 그렇다면 수행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수행을 해야 한다. 뭇 삶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고, 그것을 활용할 쓰임새를 찾으며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그것을 권장하고 독려하고 동일한 흐름을 갖다보니, 수행도 무엇을 배워야 하는 것이라 여겨 책과 공책, 필기구를 가지고 열심히 습득해서 알아내는 것으로 착각한다.
수행은 배워서 알아가는 것이 아니다. 수행은 어떤 새로운 것을 찾아 익히는 것도 아니고,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는 것도 아니다. ‘나’라고 하는 것에 대한 관찰이면서, 무엇을 ‘나’라고 하며 살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수행자들은 ‘내가’ 깨달음을 얻겠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매진한다. 이 ‘나’라는 것이 범인인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범인더러 범인을 찾으라 하니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자질이 필요하다. 세상일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삼가듯이, 수행도 다르지 않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배려하는 마음은 나의 몸에 시비심을 없애고, 대상에게도 시비심을 일으키지 않게 한다.
중국의 남악 회양 선사가 무조건 앉아서 좌선만을 고집하는 마조 스님을 보고 곁에 와서 기와를 갈았다. “무얼 하시는 것입니까?” / “거울을 만들려 한다.” / “기와를 간다고 어찌 거울이 되겠습니까?” / “앉아만 있으면 부처가 되겠느냐?” / “어찌해야 합니까?” / “소가 끄는 수레를 가게 하려면 채찍으로 수레를 치겠느냐 아니면 소를 치겠느냐?” 이 말에 크게 깨닫는 바가 생겼다는 일화는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바로 그 자리에서 마조 스님은 범인을 찾았다. 지금까지 ‘나’라고 하던 놈이 내가 아님을 알아, 수행의 방향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주인이었던 이가 객이 되고, 객인 줄 알았던 본질은 주인이 된 것이다. 객이 주인이 아님을 알아버렸으니, 비로소 제대로 수행이 시작된 것이다. 결론을 보고 ‘이 말에 크게 깨달은 바가 생겼다’는 데 초점을 두려 하겠지만, ‘무조건 앉아서 좌선만을 고집하는’이라는 부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 부분이 중요한 까닭은 회향 선사가 마조 스님이 기본적인 수행의 자질을 갖추고 있음을 보고 마지막 길을 터준 것이기 때문이다. 침묵 속에 좌선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바깥에 시비심이 사라져 계행이 지켜지고,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할 것이며, 식사하는 데 분량을 알 것이며, 항상 깨어있음을 알 것이며, 일곱 가지 올바른 성품을 갖추는 데 게으르지 않을 것이며, 보다 훌륭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에 노력할 것이다.
앎은 시작과 끝이라는 것이 없다. 몸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를 바란다. 무언가를 알게 되고, 몸으로 체험이 있고, 원하는 것을 얻게 되면 그것이 끝이라 생각하고, 알리는 것에 중점을 둔다. 자신의 공부가 끝났다고 생각하여, 행위를 살피는 것을 게을리 하고, 불필요한 것처럼 행동을 한다. 하지만 본질은 처음부터 누구의 것이 되어 본 적이 없기에, 누군가가 알았다고 할 것이 없다. 그 본질에서 벗어난 적이 없음을 알았다면, 그는 이제 함이 없다. 처음 수행할 때, 구하고, 알려 하고, 얻으려고 했던 것을 쉬고, 이제 그럴 필요 없는 완전한 놓여짐의 수행을 한다. 그는 진정한 수행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침묵으로 모든 것을 보여준다.
지휴 스님((사)여시아문 선원장)
출처 : 현대불교신문(2022.9.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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