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나고, 늙고, 병들고
승한 스님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축제다
태어남보다 죽음 먼저 언급
죽음 있기에 태어남을 강조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생명
모친·조카 죽음 보며 재확인
죽고, 나고, 늙고, 병드는 네 가지 일
인간 세상 누군들 능히 없겠는가.
삼도의 괴로움을 면하고 싶거든
때때로 자신의 주인공을 찾아보게나.
死生老病四(사생노병사)
人世孰能空(인세숙능공)
欲免三途苦(욕면삼도고)
時時覓主翁(시시멱주옹)
-월봉무주(月峯無住, 1623~?)
근데, 월봉 선사는, 왜, 남[생(生)]을 먼저 얘기하지 않고 죽음[사(死)]을 먼저 얘기 했을까. 월봉 선사 같은 고승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순리와 상식을 모르고 있진 않았을 터. 그런데 왜, 굳이, 생(生)을 먼저 거론하지 않고 사(死)를 먼저 거론했을까. 필자는 한동안 고민해봤다. 그리고 유추해봤다. 월봉 선사는 죽음과 남을 둘로 보지 않았다. 사생일여(死生一如), 생사일여(生死一如),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을 하나로 보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죽음이 있으니까 남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 ‘사생(死生)’이라고 했다. 윤회의 처음과 끝을 먼저 밝힌 것이다.
<출전 법보신문 202302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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