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 – 조성국
동명 스님
삶·죽음 경계 종이 한 장도 안 돼
번뇌 에너지를 깨달음 토대 삼아
생사윤회서 지극한 평화 찾아야
치열한 생사 현장이 열반의 터전
깃든 벌레를
오색딱따구리가 파먹고는
숨통 같은 구멍을 내놓자,
표고버섯이 부풀어 올랐다
흉한 고사목에 넌출지며 감아든
보랏빛 칡꽃도 얼크러지고
그 나무 밑 감춰둔 상수리 한 알을
입에 문 채 죽은 청설모의
육탈된 흰머리 틈새로
참나무 움이 여릿하였다
어떤 죽음이든 어떤 삶이든 유목의
먼 북방 대륙에서나 보이던 생몰의 조화가
예서 몇 발자국 안 떨어진,
내가 사는 집 근경의 산발치에서도
번번이 목격되었다
(조성국 시집, ‘슬그머니’, 실천문학사, 2007)
언젠가 어떤 스님이 서서 나뭇가지를 꺾다가 그 자세 그대로 원적에 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야말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종이 한 장도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나는 인도의 다람살라의 코라(달라이라마 존자의 궁을 크게 한 바퀴 도는 순례길)에서 박제된 야크의 머리에 실담문자로 ‘옴마니반메훔’이라고 새겨진 것을 보고, 죽음이 이렇게 친숙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시인은 유목민의 나라를 여행하면서 동물들의 시체가 육탈되어가는 모습을 보았나 보다. 시체가 잘 썩지 않는 건조한 나라에서는 오랫동안 분해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될 수 있고 흔하게 시체를 볼 수 있어서, 죽음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비옥한 우리나라에서 시체가 썩지 않고 방치되는 경우는 드물어서,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광경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던 시인은 어느 날 깜짝 놀랐다. 그런 풍경이 멀지 않은 곳에 심심치 않게 있었던 것이다. 딱따구리가 벌레를 쪼아먹기 위해 뚫어놓은 죽음의 현장에서 표고버섯이 얼굴을 내밀었다. 칡덩굴은 선 채로 육탈한 고목을 친친 감고 올라가 하얀 칡꽃을 흐드러지게 피웠다. 그 밑에서 상수리 한 알을 입에 문 채 청설모가 반열반에 들었는데, 청설모가 입에 문 상수리에서 싹이 터오르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장면에 시인이 ‘적멸(寂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남의 죽음을 토대로 살아남아야 하는 생명의 몸부림에 왜 ‘적멸’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에 “번뇌가 곧 보리요, 생사가 곧 열반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번뇌를 없애려 하지 말고 번뇌의 에너지를 오히려 깨달음의 토대로 삼아야 하며, 생사윤회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말고 생사윤회 속에서 지극한 평화를 찾으라는 가르침이다.
짐작건대, 시인의 작명에는 논리적인 이유보다는 직관적인 깨달음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시인이 보기에, 청설모가 죽을 때 입에 물고 있었던 상수리에서 참나무 싹이 오르는 모습이나 고사목을 친친 감고 올라 피워올린 칡꽃의 모습이 지극히 평화로웠던 것이다. 치열하다면 치열하다 할 수 있는 생사의 현장을 묘사하면서 ‘적멸’이란 제목을 붙인 것은, 지극히 평화로운 열반의 터전이 따로 있지 않고 치열한 생사의 현장 바로 그곳에 있음을 자연스럽게 강조한다.
나쁜 일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조용하고 차분한 것을 추구해야 하지만,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는 것, 시끄러운 광장에서도 조용하고 차분할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열반이며,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아울러, 번뇌의 에너지를 깨달음의 동력으로 삼아, 생사윤회의 한복판을 지극한 평화의 광장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추구해야 할 길이다.
동명 스님 시인 dongmyong@hanmail.net
[출전 : 1662호 / 2022년 12월 21일자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