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와 교단의 관계
붓다와 교단의 관계
혜인스님/조계종 교육아사리
“존자 나가세나여! 붓다께서는 ‘나는 비구교단을 지도한다’라든가, ‘비구교단은 나를 지도자로 여긴다’라 생각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미륵의 본성에 대해 명확히 하실 때, ‘그(미륵)는 몇 천 명의 비구교단을 지도할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지금 몇 천 명의 비구교단을 지도하는 것처럼’이라고 설하셨습니다. 이런 상반된 말씀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존자가 말했다.
“대왕이시여! 붓다는 대중에 따라가는 분이 아니시고 대중이 붓다께 따라가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고,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세속제(세속의 진리)일뿐, 제일의제(출세간적 진리)는 아닙니다. 붓다께서는 애착과 집착을 떠나셨기 때문에 ‘나의 것’이라는 고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의지처가 되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대지는 지상에 안주하는 중생들의 안주처이고 거주처입니다. 중생들은 대지에 의존하고 있지만, 대지에게는 ‘이들 중생들은 나의 것이다’라는 애집은 없습니다. 또 예를 들어, 큰 구름이 비를 내릴 때 풀, 나무, 동물, 인간을 생육하고 성장시키고 그들의 존속을 유지하지만 큰 구름에게 ‘이들 중생들은 나의 것이다’라는 애집은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붓다께서는 모든 중생들에게 좋은 가르침을 깨닫게 하고, 그 가르침에 의해 그들을 유지하고, 이들 중생들은 모두 붓다께 의지해 삶을 영위하지만 붓다께 ‘이들 중생들은 나의 것이다’라고 하는 애집은 없습니다. 붓다는 아집이 끊어져 없기 때문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존자시여!”
대학생법회에서 보시에 대한 법문을 한 적이 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우리가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의견을 나눈 후 작은 실천을 해보자고 했다. 몇 주 뒤, 한 학생이 지하철에서 구걸하고 있는 노인에게 오천원을 드리고 왔다면서 그 자리에서는 참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지나고나니 그 노인이 따뜻한 밥은 사 먹지 않고 술을 사 먹거나, 뒤에서 구걸하게하고 빼앗는 나쁜 사람들이 있으면 어쩌나 걱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노인에게 적선을 한 것이 과연 잘 한 일인지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추운 겨울, 구걸하는 노인이 자신이 준 돈으로 따뜻한 밥을 먹어야 그 돈이 제대로 쓰이는 것이라 생각했다면 따뜻한 밥을 사드렸어야지. 학생의 걱정대로 노인이 술을 마시거나 뒤의 조직에게 돈을 상납한다면 과연 그 적선이 잘못된 베풂일까? 그 돈으로 술을 마셔 언 몸을 한시나마 녹일 수 있다면, 조직에게 상납할 금액을 그날 채웠다면 매우 잘못된 적선일까? 기왕에 받은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의 판단은 이제 노인의 몫이며 어려운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베풀었다는 나의 선(善)한 행위는 일단 거기까지이다. 소위 바람직하게 누구를 돕고 싶다면 지나다 우연히 마주친 걸인에게 일회성으로 적선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중생이 아파서 나도 아프다면, 중생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한 것이다. 공감과 베풂의 문제다. 여기에, 그렇기 때문에 소유욕과 지배욕, 간섭이 생긴다면 행복은 멀어지고 아픔은 지속되는 것이다.
[출전 : 불교신문 3740호/2022년11월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