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사
장경사 & 망월사 | ||
호국불교의 성지 남한산성이 오늘(6월22) 우리나라 11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남한산성은 사찰과 군영공간이 결합한 승영사찰이 10개나 되는 곳으로 전국의 스님들이 이곳에서 정진하며 오랜 세월동안 산성을 쌓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나라를 보호한 세계적으로 드문 호국불교의 상징한다. 남한산성은 특히 축조와 운용과정에서 사찰과 스님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가치가 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스님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승군(僧軍)은 임진왜란 당시 붕괴상태에 있던 군세를 회복하고 백성들을 구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전쟁 이후 정부는 스님들의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관심을 갖게 된다. 17세기 전반에 이르러 승군제도는 제도화됐고 스님들은 성곽을 짓고 수리하는 공사에 합법적으로 동원되기에 이른다. 스님들은 성을 쌓는 축성(築城) 등 백성들을 대신해 힘든 부역을 도맡았다. 전국의 스님들이 동원돼 축성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남한산성이다. 승군제도는 불교와 스님들의 위상을 높여 조선후기 불교 존립의 원동력 역할도 했지만, 사찰 재정 기반을 위축시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하게 하기도 했다. 남한산성은 둘레 11.76km, 면적 52만 8000㎢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와 형태는 1634년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 완성됐다. 인조 2년인 1624년 이괄의 반란이 일어나고 후금의 압력이 가중되자 그해 7월 공사를 시작해 완성한 것이다. 당시 스님들은 초기단계부터 축성을 담당했다. 인조는 승도청(僧徒廳)을 두고 벽암각성(碧巖覺性) 스님을 도총섭으로 8도의 승군을 동원해 항마군(降魔軍)이라 명명했다. 각성스님은 남한산성 승군의 초대 총섭이자 8도 도총섭을 겸했다. 남한산성 축성에 이어 망월사와 옥정사 등 승군의 승영사찰도 지어졌다. 이후 한흥사, 국청사, 동림사, 수종사, 개원사, 천주사, 장경사 등의 사찰을 추가로 건립했다. 이들 사찰은 이름에도 잘 드러나 있듯 ‘나라를 지키고 국가를 안위하는’ 절들이었다. 스님들은 이곳에 상주하며 훈련과 수도방위에 만전을 기했다. 기록에 따르면 남한산성을 따라 돌다보면 곳곳에서 절을 만났으니 산성 전체가 도량인 듯했다고 전하고 있다. 스님들은 남한산성이 나라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나타내는 상징적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앞장섰다. 고영섭 동국대 교수는 “정부는 남북한 산성을 축조한 뒤 이곳 방어를 위해 스님 350명씩 각 산성을 지키도록 명했다”며 “스님들은 1년에 2개월씩 6회에 걸쳐 돌아가며 차례로 복무했다”고 밝혔다. 10여개 사찰 가운데 현재 장경사, 망월사, 국청사, 개원사 등이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 장경사에는 조선 후기 다포계 양식에 팔작지붕을 얹은 대웅전 건물과 요사채 3동이 있다. 산성 축성 때 세운 국청사도 일제에 의해 폭파당하고 터만 남아 있었지만 1968년 보운스님이 중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4.6.24. 불교신문 보도자료> 남한산성은 1624년(조선 인조 2) 벽암(碧巖) 각성(覺性)이 팔도도총섭이 되어 전국에서 승려를 모아 2년만에 완성한 산성이다. 본래 산성 내에는 옥정사와 망월사 2개의 사찰만 있었으나, 산성 축조에 동원된 승려들의 숙식과 훈련장소를 확보하기 위해 한흥사와 장경사·천주사·국청사·개원사·남단사·동림사 등 7개의 사찰을 더 지었다.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이 지은 《가람고(伽藍考)》에는 망월사가 이미 폐사지로 나오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산성 내의 다른 사찰과 함께 의병들의 본거지로 사용되다가 의병 본거지가 탄로나 일제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 중 망월사와 함께 장경사·국청사·개원사가 복원되었다. 1990년부터 중창 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른다. 장경사(長慶寺)는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성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의 축성이 시작되자 인조 3년에 승도청(僧徒廳)을 두고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전국 8도의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사역을 돕게 하였다. 승군의 숙식을 위하여 전부터 있던 망월사(望月寺)·옥정사(玉井寺) 외에 1638년(인조 16)개원사(開元寺)·한흥사(漢興寺)·국청사(國淸寺)·천주사(天柱寺)·동림사(東林寺)·남단사(南壇寺) 등 새로운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그때 함께 창건되어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축성 뒤에도 승군을 주둔시켜 수성(守城)에 필요한 승군의 훈련뿐 아니라 전국의 승군을 훈련시키는 한편 고종 때까지 250년 동안 전국에서 뽑은 270명의 승려들을 교체하며 항상 번승(番僧)을 상주입번(常駐立番)하게 하였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으로 된 3칸 동향(東向) 건물이며 요사채 3동과 진남루(鎭南樓)·칠성각·대방(大房) 등이 있다. 망월사(望月寺)는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누가 언제 창건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 초 태조(太祖)가 한양에 도읍을 세울 때 서울의 장의사(莊義寺)를 헐은 뒤 그곳에 있던 불상과 금자(金字)로 된 《화엄경》, 금솥 등을 이 절로 보냈다고 한다. 이후의 연혁은 전하는 것이 없다. 단지 《남한지(南漢誌)》에 따르면 남한산성 내에 있었던 9개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절이었다. 옛 절터는 경기도 기념물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두산백과> 2014.7.12. 오전에 절에 가서 예불을 올리고 오후에는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을 가기로 하였다. 남한산성에 들어서니 곳곳에 등재 축화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울창한 숲속에는 많은 산행객이 등산을 하고 있었다. 차량이 제법 몰려 약간은 정체되었다. 산성리에는 많은 식당이 있었고 우측으로 들어서니 망월사와 장경사 안내판이 나타났다. 좁은 소로 길을 약 5-600m 올라가니 좌측은 망월사, 우측은 장경사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장경사로 접어들어 약500m 정도 올라가니 산성 성곽 옆에 장경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장경사는 남한산성내에 위치 하였던 10여 개의 사찰중 현재 복원된 4개 사찰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옛날 건물이 남아 있는 사찰이다. 대웅전에 참배하고 언덕 위에 있는 삼성각도 참배하였다. 장경사는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망월사는 들리지 못하고 아이들이 있는 잠실로 향 하였다. 2014.7.13. 아침 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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