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은사 영월루
삼척 천은사 영월루
信之又信信無疑 湛湛虛融性自開
신지우신신무의 담담허융성자개
從此不隨塵閙轉 威音劫外任歸來
종차불수진료전 위음겁외임귀래
(믿고 또 믿고 믿어 의심 없으면/ 담담하고 비고 원융한 성품이 저절로 열리리니/ 여기서부터 세상의 시끄러움에 휘둘리지 않아서/ 위음왕불(威音王佛) 겁 밖에서 마음대로 오고 가리라.)
삼척 천은사에 걸린 주련은 ‘나옹화상가송(懶翁和尙歌頌)’에서 담(湛)이라는 선자(禪者)가 게송을 청해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 스님이 지은 ‘담선자구송(湛禪者求頌)’이다. 나옹 스님은 고려말 경북 영덕에서 태어나 20세에 출가, 중국 연경에서 인도 지공(指空) 선사의 법을 이었다. 귀국 후 오대산, 금강산, 구월산을 유력하고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나옹화상가송’은 스님의 시자 각뢰(覺雷), 각련(覺璉)이 기록, 제자 환암혼수(幻庵混修, 1320~1392) 스님이 교정했다. 고려 우왕 5년(1379년) 간행 목판본이 호암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천은사에 걸린 이 주련은 글자를 잘못 읽어 해설도 덩달아 틀리게 유통된다는 점이 참으로 아쉽다. 시문을 설명하면서 함께 이 점을 지적하여 공부자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한다.
무의(無疑)를 의종(疑終)으로 읽어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불교에서 믿음을 나타내는 신(信)은 모든 경전 첫머리의 여시아문(如是我聞)과 같은 표현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것을 말한다. 곧 삿됨 가르침을 깨트리고 정법을 드러내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는 뜻이다. 무의는 의심이 없다는 말이다. 의심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삼독심(三毒心)에서 온다. 부처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고 의심하지 않는 자리에 오르려면 삼독심을 깨트리라는 것이다.
믿음에도 바른 믿음이 절실하다. 불교를 제대로 모르면 갈팡질팡의 신세를 면치 못하거나 팔랑 귀로 분주한 마음을 일으킨다. 이를 가르쳐 주고자 ‘대승기신론’ 등 논소(論疏)가 생겨났다.
담담(湛湛)을 잠잠(潛潛)이라고 해석한 이도 있는데 역시 잘못 읽었다. 담담은 맑고 맑은 것이다. 믿음[信]으로 시작하여 의심이 몰록 사라지면 ‘담담’한 경지에 이르며 또한 원만하게 텅 비는데 이를 허융(虛融)이라고 하였다. 허융은 반야부 경전에서는 공(空)으로 나타낸다. 담담허융을 달리 나타내면 담담망언(湛湛亡言)이다. 지극히 고요하여 언설로 표현할 수 없는 경계다. 성품을 나타내는 성(性)은 마음이라는 표현인 심(心)과 같다. 성품이 저절로 열린다고 하는 성개(性開)는 마음 깨우침을 말한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우침이다. 그러므로 불(佛)은 각(覺)이다. 불자가 깨우침의 목적이 없으면 바닥없는 배와 같아서 앞으로 나갈 수 없다.
료(鬧)는 ‘시끄럽다’ ‘난만하다’의 뜻이다. 개(開)로 읽는 경우가 많지만, 료가 올바른 표현이다. 종차(從次)는 다음을 말하는 부사로 앞 문장을 이어받는다. 불수(不隨)는 따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진료(塵鬧)에서 진(塵)은 속진(俗塵), 진(眞)이 없는 세계다. 따라서 진료(塵鬧)는 사바세계다. 여기에 바퀴가 굴러가는 모습으로 만든 글자인 전(轉)을 붙인 것은 중생이 깨닫지 못하면 객진의 세상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위음(威音)은 위엄있는 음성이 아니라 위음왕불(威音王佛)이다. 위음왕불은 과거장엄겁(過去莊嚴劫) 전의 부처님이다. 그 어떤 분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계를 말하므로 겁외(劫外)라고 한다. 임귀래(任歸來)에서 임(任)은 마음대로, 귀래(歸來)는 왕래(往來)의 표현이다. 중생사의 모든 일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을 말한다.
중생이 믿음을 일으켜 정진해 깨달음을 얻어 의심 덩어리가 사라지면 진성(眞性)의 자리에 돌아온다. 이는 부처의 자리다. 중생은 매사에 걸림이 있지만 부처는 세상 모든 일에 걸림이 없다. 삼계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가? 정신(正信)으로 정정진(正精進)하라는 가르침이다.
법상 스님 김해 정암사 주지 bbs4657@naver.com
<출전 : 1628호 / 2022년 4월13일자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