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도 2022. 2. 21. 08:48

끝없이 이어지는 업보 ()의 의미

 

대풍 스님(밀양 사천왕사 주지) 

 

불자 여러분! ‘()’이라는 말은 인도 빨리어로 깜마라고 하고, 산스크리트어로는 까르마(Karma)’라고 합니다. ‘karma’ ‘Kar[]’ ‘ma[]’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까르마의 의미는 업(), 지음(), 업을 지음(作業), 소작(所作), 소행(所行)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어지고, 갈마(哲磨)라고 음역합니다. ()이란 결과를 낳는 의도적 행동을 말합니다.

 

앙굿따라 니까야 꿰뚫는 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나는 의도를 업이라 말한다. 몸과 말과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업은 의도를 가진 행동을 말합니다. 즉 마음의 의도가 바로 업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절대 창조자의 섭리나 정해진 운명을 부정하시면서, 모든 것은 인간의 의지와 행동에 따라 성립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스스로의 의지나 행동을 변화시킨다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숙명이나 절대 창조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던 내 삶의 모든 조건들은 사실 모두 스스로가 지은 업에 따른 과보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각자 삶의 모든 결과의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업에 대한 사상들은 이미 고대인도 바라문의 베다종교에서부터 설명되었지만 체계화된 업설은 우파니샤드에서부터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찬도갸 우파니샤드에서는 좋은 행위에 의해 좋은 모태에 수태되고, 나쁜 행위에 의해 나쁜 모태에 수태된다.’고 하였고 브리하트아란야카 우파니샤드에서는 그들(우파니샤드의 話者)이 말한 것은 업()이다. 그들이 칭송한 것은 업이다. 사람은 선업에 의해 선인(善人)이 되고, 악업에 의해 악인(惡人)이 된다.’고 하는 등으로 이미 우파니샤드로 오면서 업에 대한 의미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이론적 업설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불교는 이 브라만의 업설에 대한 사상들을 불교의 사상체계로 받아들여 발전시켰습니다.

 

중생이 현생에서 선한 행동이건 악한 행동이건 간에 몸과 마음과 입으로 어떠한 행위를 저질렀다면, 그 행위의 주체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가 저지른 그 카르마(karma, )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사상은 불교에서도 수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자 여러분! 인도 브라만교의 업설과 불교의 업설은 다릅니다. 브라만교의 업설은 숙명론적인 입장의 개념이 주를 이루고 있는 반면 불교는 바라문들이 주장하는 자작설, 타작설, 우연설 등을 모두 부정하고 개인의 자율성을 중시하며 연기론적 토대에서 세운 업설이기 때문에 브라만교의 업설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에 의거한 업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업을 만들게 된 근본 원인은 무명(無知) 때문이고, 그 무명으로 인해 여러 가지 생각과 의지가 생겨나 업을 짓게 된다는 연기법을 토대로 업을 재조명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쌍윳따니까야에서 ()과 고()란 연하여 생기하는 것(緣起生)이며, 접촉()을 연하는 것이다. 현자들은 이와 같이 업을 여실히 본다. 그들은 연기를 보는 자들이며, 업의 과보를 숙지하고 있는 자들이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부처님은 연기법에 의거한 업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업을 짓는데() 있어서 인간의 능동적인 측면, 즉 자율성과 의지를 업의 가장 중요한 제1요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출전 : 현대불교신문 , 202110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