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금강산 여행

이원도 2024. 3. 10. 15:25

금강산 여행



     <책장에 보관되어 있던 면장철에 전에 내가 틈나면 써 두었던 글 중에서 1999년도에 금강산 여행을 했던 여행기가 남아 있었다. 기억도 새롭게 하고 추억도 새길 겸 옮겨봅니다.>



0. 여행기간 : 1999년9월30일- 10월3일

0. 승선 배 : 금강호( 28.078톤, 10층, 승객수 1,400명, 길이 205.47m, 높이 44m, 속도 18노트







1999년 9월 30일 아침, 일산의 백마역에서 7시35분 기차를 타고 같이 여행가는 과천도서관 이희채 과장님, 경기도교육청 연규억 담당관님과 과천 전철역에서 만나기 위해 서울역으로 출발했다. 날씨는 맑고 상쾌했으나 내일 부터는 약간 비가 온단다. 기대와 한편의 께름칙한 마음을 안고 과천역에 도착했다. 두 분과 만나서 스타트랙 자동차를 타고 동해를 향해 출발하였다. 별로 붐비지 않는 거리 속에서 우선은 편안하고 약간 들뜬 기분으로, 주변을 잘 돌아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동해항에는 15시에 도착했다. 중간에 점심은 육개장으로 먹었다. 벌써 많은 관광객들이 대합실에서 출국수속을 밟기 위해 웅성거리고 있었다. 대부분 연세가 드신 분이고 가끔은 젊은 아주머니나 아가씨들도 있었다. 지로영수증을 제출하니 출입국증명서를 케이스에 넣어 목에 걸 수 있도록 2부를 주었다. 16시에 탑승을 하게 되었는데 출국수속은 일반 외국에 나가는 것처럼 수속을 밟았고 금강호 출입구에서는 미모의 러시아 여성들이 춤을 추며 우리를 반겨 주었고, 일부의 사람들은 그들과 사진도 찍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진을 찍어주고 본인들이 그것을 구입하는 것이었다.

나는 2인실인 601호 창가에 배치 받았는데(6층에 2인실이어서 아마도 1등실 인 듯) 1명이 불참을 했기 때문에 내내 혼자서 독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방의 시설은 약 5평 크기의 방에 싱글침대가 2개 놓여있고 t.v 1대, 책상 1개, 옷장 2개, 화장실은 욕실과 함께 있었는데 수건은 여러 가지 크기로 많이 비치되어 있었다. 기본 화장품인 스킨과 로션, 빗, 비누도 있었는데 시설은 호텔처럼 아늑했다. 짐을 대충 정리 하고 16시15분에 위 층 7층에 있는 대회장에서 북한 방문에 관한 방문요령 및 교육을 받았는데 주요요지는 다음과 같다.

쓰레기 버리지 말 것, 함부로 대화하지 말 것, 사진을 제한된 지역에서만 촬영, 그들의 체제에 대한 말을 하지 말 것, 남한의 우월성에 대한 얘기와 북한의 못 사는 것에 대하여 말하지 말 것, 등등 체제 비판과 환경오염에 대한 교육이었다.

숙소에 돌아와 동해항을 바라보며 떠날 때를 기다리며 여러 가지 상념에 사로 잡혔다. 과연 북한 땅은 어떨까?. 그 곳 사람들은, 사는 모습은, 금강산은 정말 그렇게 아름다울까? 등등... 드디어 18시, 금강호가 큰 소리를 내며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점점 속력을 내면서 동해항을 저 멀리 하고 있었다. 집에 핸드폰으로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특별한 얘기는 없고 안부를 묻고 이 핸드폰이 통화가 가능한 지역까지 통화를 하겠다고 했다. 19시에 7층 뷔페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음식은 대체로 정갈하고 맛이 있었다. 연세 드신 노인들도 식사를 잘 하시는 것 같았다. 식사를 하고 나서 7층 공연장에서 공연 쇼를 한다기에 피곤하고 어젯밤 장도식을 한다고 과음을 했기에 숙소에서 쉬려고 했는데, 같이 간 동료 분들이 러시아 여자도 나오고 가수도 나온다고 해서 공연장으로 갔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앞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는 간신히 뒷자리에 앉아서 관람을 하게 되었다. 공연은 19시에 시작되어서 20시30분 까지 진행되었는데, 무명가수 4명과 러시아 여자들의 춤 공연이었다. 특히 러시아 여자들은 뽀얀 피부에 인형처럼 귀엽게 생겼는데 저 사람들의 특징은 나이가 들면 도람통 처럼 뚱뚱해 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세월은 거슬릴순 없는가 보다. 공연 도중에 승무원들이 주류를 판매하고 있었는데 승무원은 주로 동남아 사람들로서 피부가 가무잡잡하고 키가 작았다. 나름대로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이희채 과장님과 함께 9층 갑판에서 밤바다를 구경했는데, 시원한 바람과 주변에는 오징어잡이 고깃배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집에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나서 조금 거닐다가 21시에 이번 여행에 참가한 사람들의 모임(통일부에서 주관)이 있다는 방송이 있어 9층 레스토랑으로 갔다. 약 69명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98년도 전반기에 같이 통일교육을 받은 분들이 있어서 반갑게 악수를 나눈 후, 통일부 관계자로부터 여러 가지 안내를 받았다. 22시 경에 숙소로 돌아와 내 방에서 옆방에 있는 이문수 과장, 타 부처 1명, 이희채 과장과 함께 담소를 나누며 술을 먹었다. 그다지 컨디션은 나쁘지는 않았지만 어제의 과음으로 술은 조금 먹었고 파도가 보통 때 보다는 거칠어 약간의 흔들림이 있었다. 23시15분에 잠자리에 누웠다. 잠을 청 하려고 했으나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배가 약간의 흔들림이 있어 멀미는 없지만 약간의 찜찜한 기미는 있었다. 불안과 설레임. 창밖은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고기잡이 집어등만 보였다. 아직은 우리 수역이다. 새벽 3시 경에 공해상을 지나 북한 수역으로 들어갈 예정이란다. 내일 어떨는지.............t.v를 보다가 끄고 잠을 청한다.

10월1일 06시, 밤새 뒤척이다가 선잠을 잔 것 같으나 별로 피곤한 것 같지는 않다. 밖에 희뿌옇게 장전항 모습이 나타났다. 삼태기 같은 형태의 포구로 한 쪽 산기슭에서는 현대의 표식과 함께 접안 시설을 공사를 하는 것이 보이고 우리를 부두까지 태워갈 배가 우리 배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접안공사의 미비로 금강호가 부두에 직접 접안할 수 없고 수km 전방에 정박함) 멀리 북한 주민의 회색빛 벽돌집이 십 여 채 이상 보이고 북한 경비병 2-3명도 나타나 우리를 주시하며, 그 중 한 명이 파손되어 낡은 방파제 위의 초소를 향해 다가왔다. 언뜻 보기에도 복장이 남루하고 깡마르게 보였다. 건너 보이는 산은 민둥산으로 나무가 거의 없었다. 여기가 바로 북한 땅이로구나!, 감회가 새로웠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7시50분에 접안선으로 이동하여 장전항 부두에 정박하였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이 흐렸다. 현대에서 비옷을 하나씩 지급하였고 즉석에서 데워 먹을 수 있는 도시락도 1개 씩 지급 받았다. 부두에는 북한 요원들이 곳곳에서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딱딱한 얼굴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으며 대략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입국수속은 우리가 하는 것과 비슷하고 두 장의 입국허가 신분증 중 1장은 목에 걸고 다니고 1부는 입국확인 인을 북한에 머무르는 동안 입출입 할 때마다 확인을 받고 최종 남한으로 출국할 때 북한 측에 반납하는 것이다. 입국허가 신분증은 성명, 생년월일, 거주지(시,군까지 기재), 성별이 기재되어 있으며 칼라사진이 부착되어 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현대소속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으며 스피커에서는 우리를 환영하는 ‘반갑습니다’라는 북한 노래가 여가수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민영미씨 사건 이후부터는 북한 요원들이 상당히 부드럽고 친절해졌다고 했다. 또 조선족 여성 5명이 도열해서 우리를 환영해 주었는데 남한 아가씨들에 비해서 미모는 아니지만 소박한 모습이었다. 버스에 승차하니 역시 조선족 운전사가 반겨주었고 곧 이어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현대 현지 책임자가 버스에 승차하여 인사를 하였다. 버스기사는 1년 계약으로 9개월 째 집에도 가지 못하고 근무하고 있으며 봉급은 대략 40 만원 정도라고 했다. 버스는 온정리 휴게소를 거쳐 오늘의 코스인 구룡연 코스를 관광하게 되는데, 온정리로 가는 원래의 길로 가는 게 아니라 특별히 관광객을 위하여 현대에서 새로 개통한 비포장도로를 통래 가게 되었다. 비포장이지만 다지기를 잘해서 평탄하였으며 도로 양편은 철조망을 설치하여 주민들과의 접촉을 차단한 것 같았으며 군데군데 북한 경비병들이 무표정하게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으며 그들은 대략 18세 전후 정도로 보였으며 깡마르고 키는 165cm 정도 되어보였다. 장전항에서 온정리까지는 약 6km 정도로 가는 도중에 논밭에서 작업을 하는 북한 주민의 모습도 보이고 남한의 여느 농촌 풍경과 흡사하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빈곤해 보였으며 작업하는 모습도 장비는 보이지 않고 여러 사람이 모여서 작업 효율도 높아 보이지 않았다. 주민들의 옷차림은 검정, 회색 계통의 옷을 입었고 아이들도 가끔 보았는데 생각보다는 건강하고 명랑한 듯 보였다. 온정리 휴게소는 평양모란봉교예단이 공연하는 공연장 1동과 매점 및 휴게소 2동으로 되어 있었으며 옆에는 김정숙 초대소 건물이 보였으며, 큰 콘크리이트 건물로 외관상으로는 허술해 보였으나 고급공무원들이 휴양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휴게소를 지나 금강산 입구로 본격적으로 접어들자 길 양 옆으로 금강산에만 자생한다는 금강송(붉은 빛을 띤 소나무로 10m이상 되어 보였다)이 빼곡이 서 있었고 아직 시기가 이른 탓인지 단풍은 완전히 들지 않았고 엷은 갈색만 조금 띤 푸른 숲을 이루고 있었다. 10시10분 경에 산행주차장에 도착하여 쓰레기 버리지 말 것, 침 뱉지 말 것 등 주의사항을 전달 받은 뒤 10시 30분부터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했는데 흐린 날씨가 본격적으로 비를 뿌리기 시작하여 우의를 걸치고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진을 찍으려니까 카메라 작동이 잘 안 되었다. 전에 괌에 갔을 때도 그랬는데 할 수 없이 같이 간 이희채 과장님 카메라를 사용하기로 하였다.(뒤에 안 일이지만 새 밧데리를 넣었지만 일반 밧데리가 아닌 고급밧데리인 알카라인 전지 같은 것을 넣어야 된다고 함) 금강산은 언뜻 보기에 설악산 보다는 더 크고 웅장한 듯 보였으나 요소요소에 북측 안내원 남녀 1명 씩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 안내원은 회색 계통의 옷에 파란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으며, 여자 안내원도 비슷한 계통의 옷에 신발은 빨간 장화를 신고 있었다. 빨간 장화를 보니 60년 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신었던 장화 생각이 불현 듯 떠 올랐다. 의복을 보니 새 것으로 지급 받은 듯 했으며 여기에 근무하는 사람은 봉급도 일반 노동자의 2배 정도로(약 150원) 엘리트에 속한다고 하였다. 사진을 같이 찍자고 했더니 ‘근무시간이라서 안 됍네다’라고 거절을 하였다. 조금 올라가니 계곡사이로 다리가 놓여 있었으며 옥류관휴게소가 보여 여기서 같이 간 일행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군데군데에 김일성.김정일을 찬양하는 문구와 방문행적을 바위에 새겨 놓았는데 그 주변을 깨끗이 청소를 해 놓아 나뭇잎 한 조각도 없었다. 또 금강산은 북한 주민들은 출입 할 수 없고 고위층 극소수 인원만 출입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람의 출입이 없고 관리를 잘 해서 그런지 환경적인 면에서는 매우 청결했으나 붉은 글씨로 새겨 놓은 찬양문구가 보기에 눈에 거슬렸다. 비가 조금 내려 바닥도 칙칙하고 우의를 입은 채로 산행을 하다 보니까 상쾌한 기분보다는 찝찝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주변의 경치만은 매우 아름다웠다. 더욱이 날씨만 좋았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필력이 부족해 그 아름다움도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많고,...., 오르는 도중에 금강문을 만났다. 금강문은 붉은 글씨로 커다랗게 쓰여져 있었으며 바위사이로 출입 할 수 있는 문처럼 생겼다. 산행길은 계곡을 따라 올라가며 연못같이 생긴 연주담, 구슬 같은 물결이 아름답게 구비치는 옥류동, 아득히 멀리 떨어지는 비룡폭포, 흐린 날씨에 궂은비가 부슬부슬 내리지만 아름다운 경치와 함께 옥 같이 맑은 물이 계곡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우의 사이로 땀이 흘러내렸다. 나이 많으신 노인들도 잘 올라가고 있었으며, 특히 여스님들이 많이 참가하여 열심히 산행을 하고 있었다. 12시15분에 목표지점인 구룡폭포에 도착하였다. 100여 m 지점에서 시원한 물줄기를 내뿜으며 떨어지고 있느 모습은 장관이었다. 주변은 정자를 지어놓아 사람들이 비를 피하여 와글와글 모여있었다. 같이 간 사람들과 함께 어렵게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서 하산을 서둘렀다. 역시 북측 안내원 몇몇이 모여 있었으며 표정도 상당히 밝아 보였다. 날씨만 좋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아쉬움을 뒤로 하며 14시에 주차장에 도착하여 가져간 점심을 먹었는데 도시락은 자체적으로 데워 먹을 수 있게 도시락 바닥에 농축된 가스가 있어 점화장치를 댕기면 자동으로 데워진다고 했다. 메뉴는 소고기 덮밥으로 맛있게 먹었다. 다시 버스로 온정리휴게소에 도착하여 16시부터 평양모란봉교예단의 공연을 관람하게 되었는데 입장료는 25달러였으며 나는 중앙 앞줄 2번 째 자리에 앉아 공연을 관람하게 되었다. 공연장은 1, 2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객석은 1층에 극장식으로 되어 있으며 앞은 무대가, 2층 왼쪽은 연주밴드가 (6, 7명 정도) 위치하고 있었다. 드디어 한복을 입은 아리다운 여성 사회자가 등장하여 환영 인사와 함께 공연할 남녀 단원을 소개했다. 공연내용은 널뛰기, 공중회전하기, 공돌리기, 곤봉주고받기 등 기교와 예술성이 혼합된 수준 있는 내용이었다. 남한은 서커스가 사양사업으로 전락하여 겨우 동춘서커스단이 명맥을 유지하며 허름한 천막에서 공연하는 것과는 달리 북한의 단원들은 공훈배우, 인민배우의 호칭을 받으며 부와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공연 중간에 막간의 시간을 이용하여 막간 배우인 뚱뚱이와 홀쭉이가 나와 몇 가지 묘기를 보여 주었는데, 머리로 정구공 받기 묘기를 보여 주면서 관객들이 공을 던져 받게 하였다. 나도 앞에 있는 관계로 공을 몇 번 던져 주었는데 나중에는 영광스럽게도 공을 받는 시범자로 뽑혀 무대에 올라가 공을 받게 되었다. 뚱뚱이는 나를 포용하며 ‘잘 오셨습네다’라고 감격에 넘친 인사를 하였다. 공받기를 몇 번 시도 하였지만 생각만큼 잘 들어가지 않고 머리 근처에만 맴돌다 들어가지 않았다. 단원들의 공연연기는 감격과 흥분 속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묘기를 보여 주었으며, 여성단원들은 우아한 미소와 힘찬 아름다움을, 남성들은 힘찬 연기와 자신감 있는 행동을 통해 관객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하나의 서커스를 예술적인 경지로 끌어올린 훌륭한 공연이라고 생각했다. 공연은 17시30분에 끝났는데 공연의 즐거움과 함께 한국적인 미를 간직한 여성단원들의 이쁜 모습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이 순간만은 남북이 하나 된, 감동과 환희에 넘친 시간이었다. ‘다음에 다시 만납시다’라는 구성진 노래 속을 뒤로 하며 장전항으로 돌아와 출국수속을 받은 뒤(금강산 관광은 숙박을 배에서 하기 때문에 입출입시 출입국 수속 형식을 밟음) 금강호 숙소에서 뜨거운 물로 개운한 샤워를 하였다.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선내 쇼핑점에서 직원들과 우리 아이들에게 줄(북한소주 2병 5,000원, 요술시계 3개 6만원, 수건, 열쇄고리, 손톱깎기 등 총 11만 2천 5백원 어치 구입) 선물을 구입하였다. 또 공연이 있었지만 피곤하여 숙소에서 t.v를 시청하며 편안히 쉬었다. 프로그램은 ‘쟈칼’을 방영하고 있었다. 침대에 편안히 누워 창밖을 보며 상념에 잠겼다. 북한 땅, 장전항, 북한 사람, 온정리휴게소, 구룡폭포, 교예단 등 오늘 접한 모든 사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회색의 마을, 순박하게만 느껴지고 체제에 순응하여 잘 살아가고, 무엇이 참 삶인지, 모르고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 그 무엇의 잣대로 평가할 것인가?. 북한 사람들을 우리 기준으로만 평가 할 것인지?. 진정 나는 행복한가????????. 여기가 꿈에서만 생각하던 북한 땅인가........,

10월2일 06시, 편안한 잠을 푹 자고 나니 온몸이 개운하였다. 창밖을 보니 날씨는 비가 약간 뿌리며 별로 좋은 날씨가 아니었다. 어제와 마찬가지의 수속을 밟고 만물상 코스로 향하였다. 오늘은 봉래호가 입항하여 어제보다도 많은 관광객으로 혼잡하였다. 금강호, 풍악호, 봉래호가 서로 엇갈리며 계속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데 아침에 도착한 배는 그 날 저녁에 재출항 하기 때문에 바다 중간지점에서 서로 교행 되며 하루 정도는 관광 일정이 서로 겹치게 되어 어제 구룡폭포 코스 보다는 오늘 만물상 코스가 더욱 혼잡하게 되는 것이다. 어제는 온정리휴게소에서 왼편으로 갔었지만 오늘은 오른편으로 돌아서 버스가 가기 시작했다. 가는 길가에는 주민들이 길을 가며 손을 흔들어 주었고 초라한 단물매점(청량음료 판매)과 일류호텔인 금강산관광호텔이 왼쪽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금강산관광호텔도 외견상으로는 회색빛을 띤 좀 우충충한 모습이었다. 오른쪽으로는 현대가 개발하는 온천장이 건설되고 있었는데 내년쯤에는 실제로 관광객을 투숙시켜 온천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좁은 길을 따라 버스는 한참 거슬러 올라가(교행 할 수 없는 도로 임. 북한은 거개 도로가 좁은데 그 이유는 차량이 적기 때문에 교행 할 차량이 없음. 북한 온정리는 현대차가 주로 다닐 뿐 북한 차량은 교예단 공연차 온 승용차 딱 1대를 보았음) 만물상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도로 양옆에는 어린 북한 군인이 일정한 거리마다(약 1-2km 정도) 보초를 서고 있었다. 10시30분에 만물상 주차장을 출발하여 산행을 시작하였는데 계곡 왼편으로 길이 나서 반대편의 기암절벽을 감상하며 올라가는데 어릴 때 중학교 책에서 본 금강산 만물상 견학기의 내용대로 오묘한 생김새, 세상의 모든 형태가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으며(곰, 토끼, 도끼로 찍힌 바위, 신선, 거북 등등등), 필력이 짧은 것을 한탄하며........, 비는 좀 그친 듯 햇볕이 나긴 했으나 바람이 몹시 불었다. 노인들도 가파른 길을 열심히 올라가고 계셨다. 정상의 천선대는 좁은 길과 좁은 공간 탓으로 서로 교대해서 올라갔는데 강풍 속에서도 그 상쾌함과 오묘한 자연의 작품에 절로 감탄사가 연발되었다. 부디 통일이 되어서도 이 아름다움이 간직되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들리는 얘기로는 현대에서 케이블카를 설치하려다가 북한 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는 말이 있었는데 힘들더라도 자연을 훼손하지 말았으면 한다. 12시에 천선대에서 사진 촬영 등 조금 머무르다가 하산을 시작하였는데 천선대 역시 수령님의 교시가 붉은 글씨로 비석에 새겨져 있었다. 날씨는 화창했으나 기온은 약간 쌀쌀 하였다. 13시30분에 주차장에 도착하여 도시락을 먹었는데 오늘의 메뉴는 자장밥이었다. 북한 안내원들의 석별의 환송을 받으며 주차장을 출발하여 온정리휴게소로 향했는데 오늘은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휴게소에서 쇼핑할 시간을 준다는 것이었다. 길가에는 북한 주민들이 간간이 눈이 띄고 약간 야윈 듯한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래도 이 온정리는 생활이 비교적 풍족하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소 여러 마리와 염소 3마리, 우리 개와 똑 같이 생긴 개 1마리도 보았다. 도중에 길거리에서 도로 보수하는 주민을 만났는데 남자 1명, 여자 2명이 비교적 깨끗한 옷을 입고 작업을 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명랑하게 보였으나 일부러 그런 것 아닌가 생각되었다. 작업도 삽으로 하고 있어 능률이 그다지 있어 보이지 않았다. 온정리휴게소에서 딴 사람들은 쇼핑을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선내에 있는 쇼핑센터보다도 더 비싼 것 같았다. 주로 북한 의 술, 인삼, 특산품, 꿀 등과 도자기류, 우표 등을 팔고 있었으며 음식은 전 종류와 우동을 팔고 있었다. 연구억 담당관이 북한 소주 4홉을 사서 이희채 과장과 함께 한 병을 다 먹었는데 그 값이 9,800원으로 선내의 2배 값이었다. 온정리 휴게소의 남녀 종업원은 모두 조선족으로 남한보다는 북한 주민들처럼 자그마한 체격과 여성들은 우리 고유의 동양적인 미를 갖고 있는 듯 했다.(남한의 서구 지향적인 미의 개념에 대비하여) 약간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장전항으로 돌아와 마지막 출국수속을 밟게 되었는데 스피커에서는 환송의 노래가 구성지게 흘러나왔으며 조선족 아가씨들의 환송도 있었으며, 출국시에는 소지한 출입 신분증 1장을 북측에 반납하였다. 출입증은 셩명, 생년월일, 거주지(시, 군까지 표기), 성별, 사진이 들어 있어 지금까지 10만여 명의 남한 주민의 인적사항이 북한 당국에 고스란히 제공된다는 점에서 마음이 께름칙한 면이 있었다. 예전에 보안에 관하여 심하게 단속할 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있다고나 할까?. 국민의 정부의 햇볕정책의 결과라고나 할까?????

북한 장전항을 뒤로 하고 바지선에 올라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북한 땅을 뒤에 두고 금강호를 향해 나아갔다. 날은 차츰 어두워지는 가운데 부두에는 현대마크를 단 15톤 트력들이 연신 질주하고 있었으며 한편에는 접안시설 공사로 바쁘게 움직이는 현대소속 근로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금강호에 탑승하여 저녁 식사를 한 후,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서 마지막 산상 공연을 관람하였다. 19시, 이제 큰 덩치의 금강호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공해상을 거쳐서 남한으로 넘어갈 것이다. 멀리서 물끄러미 쳐다보는 북한 경비병의 모습이 무척이나 외로워 보였다. 벅찬 가슴과 기대감을 갖고 찾아온 북한 땅, 현대가 장악하고 있는 현대의 식민지라 할 수 있는 온정리와 금강산 일대, 어찌 보면 북한이 아니라 현대라는 기업이 관리하는 조금마한 소국이리라. 옆방의 일행들과 술을 나눠 마시며 정담을 나누다가 23시 경에 잠자리에 들었다.

10월3일 06시 30분, 동해항이 어렴풋이 보이며 금강호는 밤을 달려 드디어 동해항에 도착하였다. 배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08시에 동해항 부두에 발을 내디뎠다. 이렇게 화창한 날씨, 전형적인 가을 날씨 속에 맑은 공기, 높고 푸른 하늘, 환한 햇빛, 약간 물들은 단풍들, 동해항의 싱그러움이 온몸을 덮고 있었다. 자유와 억압의 체제가 감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통일부에서 제공해 준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해 출발하였다.

우연힌 기회에, 극히 제한적인 북한 방문이었지만 실로 태어나서 처음 가 본 닫힌 체제의 북한, 그들도 여느 우리 동네 사람들처럼 똑 같은 모습과 같은 말을 쓰는 우리 동포였다. 어쩌다가 잘못된 위정자를 만나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그들, 어서 빨리 통일이 되어 비록 다소간 힘들더라도 우리 한민족이 서로 뭉치는 그 날, 세계로 향하는 우리 한민족의 거보는 세계 사람들을 경악과 놀람에 빠뜨릴 것이다. 또 세계를 주름잡는 초일류국가가 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북한 지역의 순수한 노동력, 깨끗한 자연환경, 풍부한 지하자원, 옛날의 따뜻한 이웃 간의 정을 간직하고 옛 풍습을 많이 간직한 사람들, 남한의 자본, 기술과 효율성을 접목 시킬 때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 작은 금강산 교류가 밑거름이 되어 남북한 주민 서로가 서로에 대한 불신감을 떨쳐버리고 상호신뢰의 마음을 보낼 때, 진정한 통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지리적, 정치적 통일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통일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 런지!!!!


1999년11월22일 거의 2달여 만에 졸필을 작성하며,    燕飛